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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시(Earthsea)는 마법사와 드래곤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 거주자들이 세상을 뒤집어엎는 화려한 판타지 액션을 선보이지는 않는다. 어스시의 마법사들은 힘이 크면 클수록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다. 개로 변신한 뒤 방심했다가는 몸과 마음까지 진실로 개가 되어버려 영영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한다는 식이다.
이 세계는 본질과 본질을 가리키는 진짜 이름―참 이름을 매우 중요시한다. 과거의 편린으로 인간에게 남은 참 이름과 지식이 “진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듯하다. 마녀들이 생활밀착형으로 어설프게 구사하는 마법도 존재하기는 한다.

!!! 스포일러 주의 !!! 

어스시의 마법사 
어스시 전집 제1권
촌구석 섬마을에서 태어난 더니(훗날 “새매”라는 이름의 마법사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세계관의 참 이름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서 함부로 노출되면 힘을 속박당할 수 있는 것이며, 다르게는 더없는 신뢰의 상징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새매”의 마법사로서의 참 이름은 “게드”이다.)가 친척 마녀와 현자 오지언을 거쳐 현자의 섬 로크에서 마법을 배우던 중에 제 안의 오만을 이기지 못해 (열다섯 나이에) 어둠에서 그림자를 불러내는 실수를 저지르고는 기나긴 바다여행 끝에 그림자를 기어이 퇴치하여 온전한 저 자신이 된다는 내용.

오지언이 아주 과묵하긴 해도 너무나 온화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게드의 어려워하는 마음은 금세 줄어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게드는 급기야 이렇게 질문할 정도로 대담해졌다.
“선생님, 언제부터 절 가르쳐 주실 건가요?”
“이미 가르치기 시작했단다.”
게드는 나오려던 말을 삼키느라고 잠깐 쉬었다.
“하지만 전 아직까지 아무것도 못 배웠는데요!”
“내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아직 몰라서 그렇지.”

32쪽, 어스시의 마법사, 어슐러 르 귄, 최준영 · 이지연 옮김, 황금가지, 1968, 1996 / 2001, 2006


“(생략) 환영은 보는 사람의 감각을 속이지. 마치 그것이 변한 것처럼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게 하는 거야. 하지만 환각으로 사물을 바꿀 수는 없다. 이 돌을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선 그 진정한 이름을 변화시켜야 한단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건, 얘야, 그게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야. 그렇게 할 수 있지, 물론 가능하단다. 그게 변화사의 재주다. 장차 준비가 되면 배우게 될 게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에 어떠한 선과 악이 뒤따르는지 알기 전엔 단 하나의 사물, 하나의 조약돌, 한 줌의 모래라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세상은 ‘평형’을 이루고 균형 잡혀 있단다. 변화와 소환에 관한 마법사의 힘은 그 세계의 균형을 뒤흔들 수 있어. 위험한 것이야, 그 힘은 말이다. 아주 파괴적인 힘이지. 거기엔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꼭 필요해서 사용하는 것이라야 해. 촛불 하나를 켜는 건 곧 하나의 그림자를 던지는 거란 말이다…….”
기예사는 다시 조약돌을 바라보았다.

75쪽, 어스시의 마법사, 어슐러 르 귄, 최준영 · 이지연 옮김, 황금가지, 1968, 1996 / 2001, 2006



아투안의 무덤 
어스시 전집 제2권
어슐러 K.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의 글은 간결하면서 우아하다. 쉽게 읽히니 쉽게 썼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 작가의 이러한 특징이 어스시 시리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책이 바로 ‘아투안의 무덤’ 아닌가 한다.

새매(게드)는 전작 ‘어스시의 마법사’의 일로 얻은 어떤 물건을 완성시키고자 아투안이라는 섬을 찾는다. 이 섬은 태초의 어둠을 숭배하는 자들이 대대로 특정한 조건을 가진 소녀를 데려와 억지로 이름을 빼앗고 아르하(먹힌 자)라는 이름을 붙인 뒤에 대무녀의 환생이라며 추앙하는 곳이었다.

아투안은 너무 외진 곳이라 새매의 뛰어난 능력으로도 마법을 운용하기 벅차다고 한다.

아르하는 미궁 전체를 샅샅이 탐사하기 시작했다. 가으내 그녀는 그 끝없는 통로들을 걸으며 여러 날을 보냈지만, 여전히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곳들이 남아 있었다. 거대한 거미줄처럼 목적도 없이 뒤엉켜 있는 길들을 붙좇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95쪽, 아투안의 무덤, 어슐러 르 귄 지음, 최준영 · 이지연 옮김, (주)황금가지, 1970, 1971, 1999 / 2001, 2006


“(생략) 그리고 너도 용주(龍主)라고 했지. 말해 봐. 용주가 뭐지?”
그녀의 말투는 시종일관 비웃는 투였는데, 그의 대답은 그런 질문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솔직 담백했다.
“용들이 말을 거는 사람이오. 그런 사람이 용주요. 아니면 적어도 그 점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용을 길들이는 재주를 말하는 게 아니라오. 용에겐 어떤 주인도 없소. 용에 관해서라면, 문제는 하나뿐이죠. 용이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잡아먹어 버릴 것인가? 사람이 앞쪽의 취급을 받고 뒤엣것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용주인 거요.”

146쪽, 아투안의 무덤, 어슐러 르 귄 지음, 최준영 · 이지연 옮김, (주)황금가지, 1970, 1971, 1999 / 2001, 2006



머나먼 바닷가 (THE FARTHEST SHORE) 
어스시 전집 제3권
‘아투안의 무덤’의 일로부터 17~18년 뒤? 이제 새매도 나이를 지긋하게 먹었다. 그는 현자의 섬 로크의 수장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내심 바다를 달리며 일선에서 활동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이날에 이르러 어스시 외곽에서부터 점차로 마법의 힘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수상한 전갈들이 로크로 찾아든다. ‘아투안의 무덤’ 일로 완성시킨 고리만으로는 세상을 지키기 모자랐던 것이다.

아렌(어스시의 공용어로 劍이라는 뜻. 달리 아렌이 가진 참 이름 레반넨의 뜻은 마가목.)이라는 소년의 성장담. 아렌의 성장은 곧 어스시의 밝은 미래가 될 것이다.
새매는 소년을 성장시키고자 곁에서 넌지시 이끄는 현자의 역할을 맡는다. 그는 늘 그랬듯이 마법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지만, 노예상인에게 붙잡혀간 아렌을 구할 때와 세상을 구할 때는 아낌없이 박력을 내보인다.

빛과 어둠,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 경계. 균형.
그리고 인격체를 인격체로 대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토로.

(생략) 아렌은 새매에게 돛에다 순풍을 좀 불어넣으면 어떻겠느냐 청했고, 새매가 고개를 젓자 물었다.
“왜 안 되죠?”
“아픈 사람에게 달음질을 시키지는 않으련다. 또 이미 무거운 짐을 진 등에다 돌 하나를 보태지도 않을 것이고.”
새매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자기 자신 이야기를 한 것인지 크게 세계를 가리켜 말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182쪽, 머나먼 바닷가, 어슐러 르 귄 지음, 최준영 · 이지연 옮김, (주)황금가지, 1972, 2000 / 2004, 2006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게 하는 그 자아는, 우리의 보물이며 인간성인 자아는 항상(恒常)하지 않단다. 변하고, 사라지지. 바다의 물결 하나인 셈이야. 하나의 물결을 보존하려고 온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조류를 얼어붙게 만들겠느냐? 너 자신을 보존하자고? 네 손의 기술을 내버리고 심장의 정열을 내버리고 일출과 일몰의 빛을 내버려 너 자신의 안전을 사겠느냐? 영원한 안전을 찾아서?

223쪽, 머나먼 바닷가, 어슐러 르 귄 지음, 최준영 · 이지연 옮김, (주)황금가지, 1972, 2000 / 2004, 2006



테하누 (TEHANU) 
어스시 전집 제4권
‘머나먼 바닷가’ 사건의 시간대. 새매가 데려온 ‘아투안의 무덤’의 그녀는 그간 어떻게 살았을까?
남자/마법사와 여자/마녀에 대한 이야기. 슬그머니 입장이 뒤집어지는 일종의 반전을 느낄 수 있다. 새매가 ‘머나먼 바닷가’의 일을 치르고 나서야 가까스로 늘그막의 로맨스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슐러 K. 르 귄식의 페미니즘 소설.

어스시 세계관의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
테나가 들려주는 “용 인간” 설화를 같이 듣고 있자면, 역시 어스시는 헤인에 속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떠오른다. 어떤 별의 어떤 특이한 종족처럼 생각되기 때문. 어스시 시리즈(Earthsea Cycle)보다 헤인 시리즈(Hainish Cycle)를 여러 권 먼저 읽은 독자로서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지역권을 벗어나면 언어가 가지는 힘―마법이 약해진다는 설정도 이런 생각을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SF 3대 거장 중 한 명인 아서 C. 클라크가 말했다. Clarke's three laws - 3. 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 충분히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이것은 어스시 책을 붙잡고 있는 나에게 과학의 세계와 마법의 세계를 바득바득 분리해서 볼 필요 뭐 있겠느냐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에 구태여 이 자리에 옮겨둔다.

문 안쪽에서 보이는 별들 중 하나는 새하얀 여름 별이었다. 아투안에서 그녀의 모국어로 테하누라 불리던 별이다. 또 하나는 뭔지 알 수 없었다. 테나는 하드 어로 테하누를 무어라 부르는지 몰랐다. 또 그것의 참 이름이 무엇인지, 용들이 뭐라 부르는지도. 그녀는 단지 자신의 어머니가 부르던 이름만 알 뿐이었다. 테하누, 테하누, 테나, 테나…….

127쪽, 테하누, 어슐러 르 귄, 최준영 · 이지연 옮김, 황금가지, 1990, 2006



어스시 시리즈는 계속해서 제5권 ‘어스시의 이야기들’과 제6권 ‘또 다른 바람’으로 이어지는데(현재까지 나온 바로는 6권이 마지막 권.)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새로 출간된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과 ‘내해의 어부’를 먼저 읽어볼 생각이다. 이 두 권은 헤인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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