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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2013년 4월에 포스팅했던 글인데, 변덕을 부려 오랫동안 비공개를 해놓았다가 다시 한 번 더 변덕을 부려 공개로 변경하면서 위로 끌어올립니다. 몇 군데 자잘하게 글 수정한 부분 있습니다.

로저 젤라즈니의 SF단편소설 “프로스트와 베타”를 소개하는 포스팅입니다. 기계와 논리의 세계에서 인간성을 유니크하게 탐구해나가는 이야기. 일견 딱딱해 보이지만, 기계들이 나누는 대화가 은근히 웃기기도 하고,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에요.





어느 날, 멍하니 이부자리에 누워있는데
주인공이 자신의 생태에 적합한 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토착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결국 그들의 신이 된다는 내용의 SF단편소설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작품이지… 누구 꺼지… 책꽂이에 꽂혀있는 SF 단편집들을 죄다 뒤집어 엎어봐야 하나…… 하다가 음, 생각났습니다. (다행이었어요.)

로저 젤라즈니.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로저 젤라즈니의 중단편들을 수록한 선집.
SF소설이란 것의 농축원액 같은 한 권.

테라포밍과 신화 탄생을 유연하게 결합한 “12월의 열쇠”. (생각 안 나 끙끙댔던 작품이 이것.)
금성에서 어룡을 잡고 화성에서 언어를 연구하는 클래식한 분위기의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후자는 ‘SF 명예의 전당’에도 수록돼 있습니다.)
놀라운 산악 SF “이 죽음의 산에서”.
어리석고 단명하는 인류를 코믹하게 그려낸 “완만한 대왕들”.
가슴 저리는 결말의 “폭풍의 이 순간”.


그리고 컴퓨터가 인간성을 탐구하다 인간이 되는 이야기 “프로스트와 베타”.
(원제 : For a Breath I Tarry, 숨결이 한 번 스치는 동안 나는 기다린다) ※ A. E. 하우스먼의 시에서 따온 제목. 이 시구는 어슐러 K. 르 귄이 ‘바람의 열두 방향’에 인용하기도 합니다.

이 단편집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라 끼적끼적 적어보겠습니다.

인류가 멸망한 지구, 수많은 컴퓨터와 기계들이 의미 없는 건설과 보수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감독하는 슈퍼컴퓨터 솔컴디브컴은 지구의 재건과 관리를 맡는 권한을 오롯이 독점하기 위해 알력싸움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전부 사라진 상황에서 이 싸움은 덧없기 한량없는 것이었지만, 그저 그들은 인류가 남긴 명령을 논리에 따라 수행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컴은 태양면 폭발 플레어로 미쳐있을 때, 아주 유니크한 슈퍼컴퓨터 프로스트를 만듭니다.
프로스트는 솔컴의 명령을 받아 지구의 북반구를 담당하며 수십만 가지 일을 서너 시간 만에 해치웠고 나머지 시간은 열정적으로 취미에 투자했습니다. 그의 취미는 인간 연구였습니다.

로봇 하나가 몇몇 유물을 발견했다 ――― 원시적인 나이프, 조각이 새겨진 상아 따위의 물건이었다.
(생략)
「그것들은 원시 인간들의 유물이다.」
솔컴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고,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프로스트는 그것들을 관찰했다. 유치했지만, 디자인에서는 어딘가 지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기능적이면서도, 어딘가 순수한 기능을 일탈한 곳이 있었다.
인간이 그의 취미가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p.316, “프로스트와 베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열린책들, 1966, 2002)


프로스트는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 욕조의 파편과 반도체에 저장된 동화집, 양변기 시트 반 개 등을 수집했고, ―솔컴과 디브컴의 싸움으로 유발된 일에 의해― 어느 날부터는 인간의 책을 제공받고 그들의 성질을 고찰하면서 자신이 인간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내기를 벌이게 됩니다.

「당신은 이런 것들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단지 인간이 알 필요가 없었던 일들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 치수, 무게, 온도, 중력 등을. 기분에는 공식이 없습니다. 감정에 전환 계수 같은 것은 없습니다.」

「기계는 뒤집혀진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기계는 프로세스의 모든 세부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계는 인간처럼 프로세스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우주의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강대한 프로스트여.」

(p.323, 324, “프로스트와 베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열린책들, 1966, 2002)


프로스트는 인간의 예술품들을 “측정”하고 직접 조각이나 회화에 도전하면서 인간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들은 예술이 되지 못한 모방에 불과했고 여전히 감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인간성의 본질은 인간의 생리에 입각해있다”면서 ―인간의 유해를 발견했을 시, 수행해야하는 지령을 어기면서까지― 인간의 육체를 만든 다음, “의식의 매트릭스를 인간 육체의 신경계로 전이”시킴으로써 테스트 삼아 5분 동안 인간이 되었다가 그만……!!!!!!

그는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눈을 떴다.
(생략)
일어서려고 했지만, 평형 감각 및 근육의 협조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목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그는 절규했다.
(생략)
그는 울었다.
(생략)
그는 흐느꼈다.
(생략)
그는 입을 열었고, 애써 단어를 형성하려고 했다.
「……나는…… 두렵다!」

(생략)

모오델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입술을 통해 제게 말했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절망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계측 불가능한 것입니다. 프로스트는 인간입니다.」
「그는 출생의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자신의 내부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베타가 말했다. 「다시 한 번 그를 신경계로 돌려보내서, 적응할 때까지 그곳에 있게 하십시오.」
「안 돼.」 프로스트가 말했다. 「그런 짓을 하지 말아 줘! 나는 인간이 아냐!」

(생략)

「우리는 그의 생명을 지키고 그것을 그의 몸 안에 보존해야 한다.」 디브컴이 말했다.
「그의 의식의 매트릭스를 그의 신경계로 되돌려 놓으라.」 솔컴이 명령했다.
(생략)
「멈춰!」 프로스트가 말했다. 「너에게는 동정심이라는 것이 없나?」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계측과…….
  ……의무뿐입니다.」
모오델은 이렇게 덧붙였다.

(p.355, 357, 358, “프로스트와 베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열린책들, 1966, 2002)


자. 프로스트는 이렇게 인간이 되었고,

― 작품의 메시지는 제쳐두고, 이 장면 은근히 귀엽지 않나요. 인간이 돼 봤더니 계측은 안 되지, 감각은 폭주하지, 공포는 엄습하지…. 그래서 오랜 세월에 걸쳐 꿋꿋이 해왔던 인간 오타쿠질 다 내팽개치고 나, 인간 아님! 인간 못 됨! 안 함!!! 하고 두 손 들고 틀어박혔는데 주변 컴퓨터들이 의견을 주고받더니만 넌 인간이 되었음. 고로 다시 인간이 되셔야겠습니다 하고서 억지로 그를 인간 육체에 가둬버렸어요. 안 돼. 하지 말아 줘! 동정심도 없냐? ―

인간이 된 프로스트의 명령을 받들어 솔컴과 디브컴은 기나긴 싸움을 멈춥니다. 경사로세, 경사로세!

그리고 번역된 제목을 통해 드러나는 또 하나의 주인공 베타에 대해서는
직접 책을 읽어보실 것을 추천 드릴게요. (로저 젤라즈니가 문장 몇 줄로 순식간에 로맨틱한 연애담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인은 컴퓨터여도 인간이어도 현명하고 강하다는 것, 많지 않은 말로도 깊이 통하는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는 것 등의 주장을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요. 모호하게 에둘러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 적어버리면 재미없으니까요, 이 포스팅에서는 일부러 거의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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