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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패션지 “에스콰이어” 2011년 10월호 특별 별책부록 SF 단편선 ‘멀티버스’.

국내작가들의 SF단편소설 아홉 편을 수록한 오리지널 선집입니다.
여성지도 안 사는 제게 남성지를 사게 만들었던 아주 독특한 특별부록이었습니다. 이런 부록을 남성지에서 창간 16주년 기념으로 마련하다니요?! 지금 생각해도 참 유니크―――.

늘 60, 70년대 미국 SF만 끼고 살다가 우리네 정서가 깔려있는 현대소설들을 접해보니 편하게 읽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참 싱그러운 독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어슐러 K. 르 귄 소설들의 번역자로만 생각했던 이수현이라는 작가를 의식하게 되는 계기를 주기도 했습니다.
정세랑, 곽재식이라는 이름도 기억해둬야 할 것 같았습니다. 보통 이야기꾼이 아니다 하는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나는 모조 지구에 거주하는 유일한 진짜 인간이며, 홍보 책임자이다. 연봉을 25퍼센트 인상해준다는 말에 속아서, 외계인에게 납치당했다. 머저리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다. 싱가포르 외곽에 새로 생기는 국제적 놀이공원의 동아시아 담당 홍보 팀장을 뽑는다길래 지원했는데, 면접 후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우리 은하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지구에 있는 통장에 월급이 차곡차곡 잘 들어가고 있다는 확인서를 매달 받지만, 됐다 그래. 이런 곳에 발이 묶여서 푸드 스탬프로 합성 단백질을 받아먹고 사는데, 새우잡이 배에 인신매매당한 것과 대체 무슨 차이란 말인가.
(중략)
어학연수를 못 다녀온 게 늘 아쉬워서 외국에서 일해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외계에서 일하게 되었다.

p.62, 모조 지구 혁명기, “에스콰이어” 2011년 10월호 별책 SF 단편선 ‘멀티버스’, 정세랑, (주)가야미디어


정보보안학 교수는 그동안 나온 중력 이론이나 전기에 관한 이론의 가장 결정적인 사항이 우주 프로그램에서 어디에 해당하는지 찾아냈다. 그러니까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까닭은 프로그램의 87010번째 줄에 그렇게 하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생략)
“진나라의 분서갱유 이후, 학자들은 모든 학문들을 연구할 때 옛날 공맹과 같은 성현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내고, 그 참뜻이 무엇이었는지 토론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학문을 일구기 위해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기보다는 옛날에 나온 대가의 책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훈고학의 시대였습니다.
 이제 우주의 모든 이론과 원리가 담긴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이해하고 분석하기만 하면, 우리는 무슨 법칙이건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훈고학 시대인 것입니다.”

p.221, 222, 읽다가 그만 두면 큰일 나는 글, 상동, 곽재식, (주)가야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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