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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영화 ‘스캐너 다클리’ 감상기에도 썼던 소리지만, 나는 필립 K. 딕을 상당히 꺼리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자극적이고 투박하며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나와 내가 아닌 것, 주인공이 그 경계선의 존재를 깨닫고는 우왕좌왕하는 것. 그리고 사실 그 경계선이란 것은 진즉에 무너져 있었다는 소재를 곧잘 다루는 듯하다. 주인공은 끔찍한 상황에 처하지만, 책 너머 독자―철저한 타자인 나에게는 돌아가는 꼴이 우스꽝스럽게 읽힐 뿐. 이런 감상은 책을 들고 있는 내게 곧바로 ‘불편함’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그 부메랑은 가슴이나 그런 델 치는 게 아니라, 꼭 뒤통수를 때리지…….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일찍이 접해본 적 없는 상상력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는 불쾌한 반전으로 단편을 급히 마무리하는 스타일. 배드엔딩의 황제.
작가가 신경증, 망상증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의 책을 읽는 독자도 더불어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또한 작가는 살아생전 여성혐오증도 앓았음에 분명하다! 52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 동안,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으면서 무슨 해괴한 경험이라도 했던 것인지? 여성이란 존재가 싫으면서도 여성 없이는 살 수 없음에, 작중에서나마, 저주라도 퍼부었던 것일까.
작가를 생각할 때 딱 한 가지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건 그의 글에서 신경증과 망상증이 묻어나는 만큼 애묘인 기질도 묻어나오더라는 것이었다.

“이게 그 ‘방울뱀’이라 부르는 동물인가? 방울 소리가 들리는데.” 드윈터 박사는 살짝 몸을 뺐다.
“고르릉거리는 겁니다.” (중략) 밀트 비스클은 새끼 고양이를 쓰다듬어주었다.

p.130, ‘귀중한 유산’,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필립 K. 딕,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1963, 2012






25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있는데, 단편 하나 뗄 때마다 책을 덮고 소모된 정신력을 회복하느라고 진을 빼야했던 책.
735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읽는 동안, 안도의 한숨을 쉬며 편하게 덮을 수 있었던 단편은 딱 한 편. ‘컴퓨터 씨(Mr. Computer)가 나무에서 떨어진 날’뿐이었다. 이 단편소설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여성이 긍정적 대상으로 그려져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음, ‘외계인의 사고방식’도 괜찮았다! 작가가 늘 이 정도의 블랙유머감각으로 브레이크를 걸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사랑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을까?

도대체 SF마니아 및 영화제작자들은 필립 K. 딕을 왜 그렇게 사랑하는 것일까.
토머스 M. 디시가 쓴 서문에 그 해답은 바로 나온다.

왜 이런 작가에게 그런 엄청난 찬사를 바치는 것인가?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답은 명백하다. 그의 아이디어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던 것이다. 장르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보통 새로운 개념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그 실행 과정이 허술하더라도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 (생략) 그리고 딕의 훌륭한 착상은 상상력의 스펙트럼 안에서 독특한 파장 하나를 점유하고 있다.

p.10, ‘서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토머스 M. 디시,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1986, 2012


필립 K. 딕은 SF작가들의 뮤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건드려보라고, 길게 풀어내보라고, 당신의 세계에서 다른 관점으로 파고들어보라고 귓가에 속삭여대는 것이다……. 꼭 그의 세계에 매료되지 않았더라도 세련된 문체 혹은 기승전결로 그의 세계를 확장시켜보이겠노라고 눈을 빛내는 작가도 있을 수 있겠지. “소재 빼곤 다 마음에 안 든다!” 하고 열불 터져서 그렇게 될 수도 있겠고.

그리고 나는 필립 K. 딕을 꺼리면서도 언젠가 그의 작품을 또다시 찾아보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유빅’이라도 읽어야 할까요. 그 책을 읽으면 작가를 좋아하게 될까요. 그런들 안 그런들 어떠랴 싶긴 하지만.

“이 가죽으로 제본한 책은 또 뭐가 있나?”
“톰 페인의 『이성의 세기』가 있습니다.”
“결과는 어땠지?”
“267쪽에 달하는 백지였습니다. 그 정 가운데에 ‘으이구’라는 한 단어만 적혀있었고요.”
“계속해보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있습니다. 변화시킨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항목을 통째로 덧붙여놓았더군요. 영혼에 대해, 윤회에 대해, 지옥과 천벌, 죄악과 불멸성에 대해 말입니다. 스물네 권의 전집이 모두 종교적인 내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p.340, ‘표지로 판단하지 말지어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필립 K. 딕,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1965, 2012


순간 그는 깨달았다. 우리는 닫힌 타임 루프 안에 갇혀버린 거야. 계속해서 이 시간을 살면서 재진입 시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지. 매번 이번이 처음의 시간이라고, 유일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절대 성공하지 못하는 거지. 몇 번째 시도인 걸까? 백만 번째일지도 몰라. 우리는 여기 백만 번째로 앉아서, 똑같은 사실을 계속해서 나열하면서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자 탈진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 이런 불가해한 난제에 부딪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거대한 철학적 적개심을 느꼈다.

p.486, ‘시간 여행자를 위한 작은 배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필립 K. 딕,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1973, 2012


내 여자 친구인 이사벨 로맥스는 내가 그런 일을 잘하지도 못할 것이며 어쨌든 돈도 벌지 못할 것이고 SF소설은 한심한 것이며 여드름이 난 사람들만 읽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SF소설을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드름이 난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p.563, ‘시빌라의 눈’,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필립 K. 딕,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1975, 2012


젠장, 우주선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복잡한 항상성 유지 장비가 회로에 접속되었고, 우주선은 직접 아홉 번째 인간에게 말을 걸었다.
“살짝 깨어난 모양이군요.” 우주선은 정신 연결을 통해 그에게 말했다. 아홉 번째 인간을 완전히 깨우는 일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이번 항해는 10년 동안 계속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p.663, ‘어서 그곳에 도착했으면’,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필립 K. 딕,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198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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