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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젤라즈니가 생애 마지막으로 완성했다고 하는 소설.
크툴루 신화 베이스.

음모, 주술, 살인, 시체 파헤치기, 시체유기 등이 소재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던 한 권. 작가가 흥에 겨워 즐겁게 지은 크툴루 동화(…)라는 느낌을 받았다. 서양의 동화나 동요에는 으슬으슬한 것들이 각별히 많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소설의 화자가 스너프라고 하는 감시견이기 때문에 더더욱 동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일 터.

개 스너프는 인간 주인을 도와 괴물들과 동네의 상황을 순찰하고 경계를 서며 누가 게임의 참가자인지 탐색하는 동시에 의식의 중심점을 계산하느라 바쁜 10월을 보낸다.

아직 정확한 위치는 계산하지 못했다. 나는 언덕 위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걸었고, 계산하면서 이 돌 저 돌에 오줌을 적셨다. 선을 더듬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그냥 좌절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답이 나왔고, 나는 마음속에 그 위치를 새겼다. (생략) 흥분으로 강아지처럼, 열광적이고 순진한 강아지처럼 가슴이 뛰었다. (생략)
그 순간 나는 고양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그레이모크를 찾아 나섰지만 아무 데에도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란 정말 필요할 때는 주위에 없는 법이다.

p.110, 고독한 시월의 밤, 로저 젤라즈니, 이수현 옮김, 시공사, 1993, 2010


“제발, 날 그냥 놔둬. 난 단순한 숲쥐야. 스너프! 날 잡아먹게 놔두지 마!” 부보가 말했다.
“식사는 이미 했어. 게다가 동료 참가자로서의 예의가 있으니…….” 그레이모크가 말했다.
(생략)
“날 갖고 노는 거지. 고양이들은 다 그래. (생략) 정말로 식사한 지 얼마 안 된 거야?”
“그래.”
“더 나쁘군. 더 오래 가지고 놀 거 아냐.”
“좀 닥쳐봐!”
“봤지? 예의는 무슨.”

p.253~255, 고독한 시월의 밤, 로저 젤라즈니, 이수현 옮김, 시공사, 1993, 2010


주인공 스너프 말고도 고양이 그레이모크, 올빼미 나이트윈드, 뱀 퀵라임, 박쥐 니들, 다람쥐 치터, 쥐 부보, 까마귀 테켈라 등이 등장하여 제각기 인간 주인을 위해 현황을 파악하고 책략을 꾸민다.
시월의 끝, 만성절 전날인 할로윈날밤에 세상의 앞날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의식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진실을 말하는 사람, 거짓을 말하는 사람, 진실을 찾는 사람, 자신의 길을 가는 예지자, 충실한 동반자, 속임수와 유쾌한 반전 그리고 한 줌의 친구들.
1800년대 후반 영국을 배경으로 주술과 마법, 기괴한 사건들과 할로윈 그리고 크툴루 신화의 세계가 펼쳐지는 판타지.

책 서두의 이 헌사가 얼마나 정직한 것이었는지, 한창 읽는 중에야 깨닫고는 웃음을 터뜨렸더랬다.
러브크래프트를 몰라도 손뼉을 탁 치면서 읽을 수 있는 책 아닐까. 로저 젤라즈니가 크툴루 신화를 빌려 쓴 소설이라고 해서 고른 책이었지만, 여러 차용이 많아 예상 밖의 재미를 잔뜩 얻을 수 있었다. 미처 몰랐던 것들도 책 말미의 역주로 배울 수 있었고. 친절한 번역자 님, 고맙습니다!!!



크툴루 신화란?

H. P. 러브크래프트(1890~1937)라는 공포, 판타지, SF 작가가 발표한 기괴한 소설들에 매료된 소설가 및 편집자들이 그 세계관을 확장시켰고, 러브크래프트도 다시 그 세계를 받아들여 소설을 쓰면서 공고히 구축하게 된 가상의 세계관. 다시 말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

신화라고 해도,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의 이런저런 영웅 신화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
크툴루 신화의 신들은 인간에게 애정을 갖기는커녕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그냥 움직이다가 밟으면 밟았는가 보다 하는 정도……라도 느끼는 지나 모르겠다. 인간은 그저 “별의 무수한 티끌 중 하나”일 뿐. 인간이 느끼는 우주적 공포, 코즈믹 호러 세계관. 사실은 신이라기보다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외계인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로저 젤라즈니는 이러한 코즈믹 호러 세계관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작품을 끌어들여 ‘고독한 시월의 밤’이라고 하는 기괴하고 음습하면서도 유쾌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잔혹동화 한 편을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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