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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드라마 ‘플래쉬포워드(FlashForward, 2009~2010)’의 원작소설.
할리우드에서는 모든 것이 ‘누구를 알고 있느냐’로 통하는데, 나의 에이전트인 빈스 제라디스는 제작자인 제시카 보시츠키와 오랜 친분이 있었다. 『플래쉬포워드』 출간 직후, 빈스는 제시카에게 증정본을 전달했고, 그녀는 친구인 데이비드 S. 고이어(후에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에게 읽어보라고 주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자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
8쪽, 한국어판 서문, 플래쉬포워드, 로버트 J. 소여 지음, 정윤희 옮김, 미래인, 2010
로이드 심코 박사와 테오도시오스 프로코피데스(27세, 대학원생, 로이드 심코 박사의 파트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강입자가속기 통제센터에서 입자 충돌 실험을 행한다. 힉스 입자를 발견(해서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실험의 순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약 2분 정도의 환상을 보게 된다!!! 의식을 되찾은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어보고 각자가 본 이 환상이 21년 후의 미래라는 결론을 내린다.
모든 사람이 생각도 못한 상황에서 한꺼번에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승용차사고, 항공사고, 낙사사고 등이 각지에서 일어나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로이드의 약혼녀인 미치코의 딸 역시 의식을 잃은 운전자가 몬 버스에 치어 목숨을 잃는다. (미치코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한편, 로이드가 본 환상은 자신이 지금의 약혼녀 미치코가 아닌 다른 여인과 살고 있는 것이었고, 미치코가 본 환상은 일본에서 (지금은 아직 낳지 않은) 딸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테오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이렇게 연락을 드린 건 환상 속에서 당신을 봤기 때문이에요.”
테오는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 같았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환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되면 이 여자가 21년 후에 그를 만났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당연히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 있다는 뜻이 되고, 그때쯤 죽은 목숨일지도 모른다는 로이드의 말은 틀린 게 되는 것이다.
(생략)
“혹시 어떤 환상이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실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거든요.”
“유감이군요. 하지만 환상을 못 본 게 당연한 것 같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요하네스버그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신문을 읽고 있었어요. 종이로 된 신문은 아니었고 평평한 플라스틱 재질에 컴퓨터 화면처럼 뉴스를 읽을 수 있게 된 장치로요. 어쨌든 제가 읽은 기사 내용은…… 이런 말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당신의 사망과 관련된 기사였어요.”
(생략)
“제 부고 기사 말이군요.”
테오가 반복했다. 아직 배우지 못한 단어를 처음 들은 것처럼.
“네, 맞아요.”
82~84쪽, 플래쉬포워드, 로버트 J. 소여 지음, 정윤희 옮김, 미래인, 1999, 2010
“플래쉬포워드? 이름은 잘 붙였네.”
뉴스 앵커가 언급했던 용어가 흥미롭다는 듯 로이드가 덧붙였다.
제이콥이 끄덕였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만행’ 같은 이름보다는 훨씬 좋은데요.”
로이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러게.”
91쪽, 상동
<간추린 뉴스>
토론토 운송위원회는 플래쉬포워드로 인한 운송 중 사고와 사망자 속출로 총 100만 캐나다달러가 걸린 집단소송에 휘말렸다. 토론토 운송위원회가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아래에 미리 안전장치를 설치하지 않아 플래쉬포워드 당시 더 큰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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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엔화 가치의 급락으로 일본 경제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는 2030년에 엔화가 미국 달러에 비해 절반의 가치로 하락한다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진술로 인해 벌어진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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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암트랙과 캐나다의 비아 레일, 영국의 브리티시 레일의 이용 승객이 크게 증가했다. 플래쉬포워드 당시 철도 관련 교통수단에서는 단 한 건의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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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주 분리주의자들의 불만이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여론조사기관 맥클린이 밝혔다. “21년 후에도 퀘벡이 캐나다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후부터 수많은 골수 분리주의자들이 캐나다로부터의 독립을 포기했다”고 맥클린 관계자는 전했다.
102쪽, 139쪽, 153쪽, 상동
미치코는 딸을 잃은 슬픔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테오는 자신이 미래에 당할지도 모르는 살인사건에 대한 단서를 조금이라도 찾기 위해서 모자이크 웹사이트를 만든다.
“사실, 내 생각으론 당신이 미래에 일어날 살인사건에 대해 공개하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싶어요. 아침에 로이드한테 말했더니 생명보험회사들이 앞으로 21년 이내에 사망할 것이 확실시되는 사람들 명단을 수집해서 가입 정책에 반영하려 들 거라더군요.”
테오는 위액이 역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략)
“그저 데이터베이스를 하나로 합치는 데만 도움을 주면 되니까. 우리 연구소는 최고의 컴퓨터 시스템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도 컴퓨터 프로그램 만드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곳이잖아요. 월드와이드웹WWW도 여기서 만든 거니까.”
104쪽, 상동
테오와 미치코는 사람들이 목격한 환상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는 웹사이트를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웹사이트 이름은 ‘모자이크 프로젝트’라 부르기로 했다. ‘모자이크 프로젝트’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오랜 세월 잊혔던 웹브라우저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이제는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와 연구원들과 글을 올려줄 전 세계인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저마다 경험했던 환상들은 2030년이라는 거대한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작은 퍼즐의 역할을 하게 될 테니까.
140쪽, 상동
한편, 로이드는 민코프스키 큐브 이론을 들어 미래, 현재, 과거는 그 자체로 실재하며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으며, 플래쉬포워드에서 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현재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로이드와 미치코는 어떻게 해도 파국을 맞는다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이 죽는 미래가 이루어져서는 안 될 테오는 미국의 SF 작가 니븐의 법칙을 들어 우주가 역설을 내포하는 시간여행을 허용하지 않았으리라는 이야기를 꺼낸다. 동료 물리학자는 다세계해석(양자역학, 슈뢰딩거의 고양이, 관측의 순간에 고양이가 살아있는 우주와 고양이가 죽은 우주로 분리된다) 개념을 꺼내든다. 그러나 로이드는 “다른 세계의 내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야하고, 다른 세계의 내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야한다”면서 결정론적 철벽을 친다. (202쪽~)
로이드는 21년 이내에 헤어질 것이 분명한 미래를 감수하면서까지 현재의 사랑을 관철하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우주에는 우리가 현재 속한 단 하나의 시공간 연속체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리학자로서, 무의식중에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미치코는 “티플러의 불멸”을 들어 로이드를 설득한다.
테오의 동생은 디미트리오스라고 한다. (하하, 드라마판의 주요배역인 드미트리 노Demetri Noh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플래쉬포워드 시점 이전에 사망하리라는 설정은 테오에게서 나왔고.) 그는 작가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플래쉬포워드에서 본 미래로 크나큰 절망을 겪는다.
“(생략) 난 앞으로 21년 후에도 유명 작가가 되지 못해. 결국 실패하게 될 거라구. 21년 후에 난 레스토랑에서 관광객들에게 음식을 나르고 있었어.”
(생략)
“그 레스토랑에 찾아가봤어. 바람의 탑 바로 옆에 있더라. 환상 속에서 봤던 매니저도 있었는데, 그 사람도 환상 속에서 나를 봐서인지 한눈에 알아보더라구. 나도 그랬고.”
(생략)
“예술가를 계속 살 수 있게 만드는 건 꿈이 있기 때문이야. 그날 환상을 보고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지금 이 순간 꿈을 포기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파리의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이 21년 후에도 세상이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팔레트를 집어던진다는 건 알아? 부모님 창고에서 연습하던 수많은 록밴드들이 팀을 해체하고 있는 건? 형은 수백만 명의 꿈을 순식간에 빼앗아버렸어.”
(생략)
“(생략) 2030년에 죽는 사람은 형만이 아니야. 나도 죽어. 관광객에게 바가지요금이나 씌우는 웨이터로 죽어갈 거라구! 형이 사람들을 죽인 거야. 수백만 명을. 형이 그들의 희망, 꿈, 미래를 다 죽였다구!”
244~245쪽, 상동
결국 테오의 동생 디미트리오스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로써 역설적이게도 미래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이제 그가 살아서 서빙을 하는 미래는 성립 불가능하므로 로이드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리고 미치코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싶으면 두 번째 입자 충돌 실험을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 안건은 유엔 총회에 올라가고, 세계 각국은 갖가지 계산을 거쳐 이 두 번째 실험 제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첫 번째와는 달리, 이제 지구 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안전하게 누워서 두 번째 플래쉬포워드를 기다린다.
그리고 두 번째 실험의 결과는…… 드라마판을 본 독자라면 그만 현실웃음을 터뜨리고 말 내용이리라고 생각한다.
(시즌 2를 노린 듯 무리한 진행과 엔딩을 보였던 드라마판과는 다르게)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 선택의 결과가 어떠했고 미래가 어떠한지를 시원하게 다 알려준다.
플래쉬포워드에서 본 어떤 것들은 이루어지고, 어떤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외로 어떤 것은 이루어지고, 의외로 어떤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가는 소설 전반에 뿌려두었던 복선을 아주 능숙하고 능청스럽게 회수한다. 특히 테오의 결말(?!)에 대해서는 훌륭한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감정의 흐름이나 인과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이 소설은 SF소설답게 수억 년 뒤의 우주와 미래, 존재를 고찰하는 이야기를 슬며시 독자에게 들려준다. 사람들은 교훈을 존중하고 사랑을 소중히 한다…….
드라마판은 이 원작소설의 멋진 소재를 가져와서 무리하게 음모론을 집어넣고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바람에 균형감을 잃고 감정선이 엉망이 된 감이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존 조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국드라마의 의사, 변호사, 범죄자가 사랑을 한다면 미국드라마의 의사, 변호사, 범죄자는 범인을 잡는다는 드라마제작업계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균형을 잘 잡고 설득력 있게 시나리오를 썼더라면 아낌없이 찬사를 바쳤겠지만, 비밀조직 뒤의 비밀조직이 나오고 미국 정부는 그래서 뭐 왜 뭐, 주요인물간 애정관계도는 급격히 휘청거리고 민코프스키의 큐브가 박살나 우주가 큰일이 났는지, 주인공의 생사여부는 알려주지도 않고 끝나고서는 그대로 시즌 캔슬.)
소설에는 FBI나 CIA, 이득을 위해 거듭 플래쉬포워드를 일으키는 비밀조직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미래에는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멈추기에는 과학발전의 속도가 너무나도 빠르고 지향하는 시점이 아득히 멀다. SF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드라마판의 기억을 잊고 한 번 펼쳐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