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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adne의_실타래

[冊] 로드 (THE ROAD)

단련 2014. 10. 10. 19:00

포스트 아포칼립스 (묵시록 이후의 세계, 세계멸망 이후의 세계).
종말 문학.

남자와 소년은 다가오는 겨울을 피해 남쪽으로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간다. 소년의 성품은 선량하며 남자는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들은 약탈자들을 경계하며 아주 주의 깊게 조심조심 남향하고 있다. 세상은 죄 불타오른 뒤의 잿빛으로 덮여있으며 적막하다. 길 위에는 사람도 없고 먹거리도 없다. 간혹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인육을 먹는 사람들, 아주 악독한 방법으로 인육을 먹는 사람들, 남을 도우면 우리가 죽는다며 고개를 돌리는 아버지, 도움을 받고나서도 감사는커녕 비판이나 해대는 노인….
종말의 거의 끝에 다다른 듯한 세상에서 그야말로 우리네 자화상 같은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이 담요와 통조림 담은 카트를 밀며 비닐로 동여맨 걸음걸음을 옮긴다. 남자는 오늘도 기침을 해대면서 시시각각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 생명이란, 신(神)이란 모두 그의 아들에게 있다.

스릴러적 반전이나 독특한 세계관 같은 것이 있지는 않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팬보다는 일반 문학 독서가들이 종말 문학의 입문서로 읽으면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 죽어 말라비틀어져가는 잿빛 세상을 시적으로 읊조리고 있어서 가슴이 저미고, 남자가 극한상황에 몰렸을 때에도 아들과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들이 애틋하다. 소년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들을 품고 기존과 다른, 조금 더 큰 사회로 나아가게 되는 결말도 좋다. (책 붙잡고 눈물 먹을 뻔 했지만.) 신은 죽지 않는다, 뒤에 오고 앞에 간 세대가 있는 한.

멀리서 천둥이 치는 소리에 남자는 일어나 앉았다. 사방에 희미한 빛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떨리는 빛은 검댕이 떠다니는 비에 굴절되었다. 남자는 방수포를 끌어당겨 그들의 몸을 덮었다. 잠을 깬 채로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다. 몸이 젖어도 말릴 불이 없었다. 몸이 젖으면 죽을 터였다.

그런 밤에 잠에서 깨어 마주친 암흑은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암흑은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면 귀가 아플 암흑이었다.

20쪽,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06, 2009


문 옆에 음료수 자판기 두 대가 있었다. 모두 바닥에 쓰러진 채 강제로 뜯긴 상태였다. 재 속에 동전들이 널려 있었다. 남자는 주저앉아 속이 드러난 기계의 안을 손으로 헤집었다. 두 번째 기계에서 그의 손은 차가운 금속 원통을 찾아 쥐었다. 남자는 천천히 손을 꺼냈다. 눈앞에 코카콜라가 보였다.
그게 뭐예요, 아빠?
특별한 선물. 너를 위한 거야.

29쪽, 상동


남자는 지갑을 가지고 다녔는데 결국 지갑 모서리 때문에 바지에 구멍이 났다. 어느 날 남자는 길가에 앉아 지갑을 꺼내 내용물을 살폈다. 돈 약간, 신용카드 몇 장. 운전면허증. 아내 사진. 남자는 그 모두를 아스팔트 위에 펼쳤다. 마치 카드놀이를 하는 것처럼. 남자는 땀으로 검게 전 가죽지갑을 숲에 던지고 사진을 든 채 앉아 있었다. 이윽고 남자는 사진마저 길에 내려놓고 일어서서 걸어갔다.

61쪽, 상동


그들은 담요와 방수포와 남은 통조림을 넣은 배낭과 가방만 챙기고 카트를 버려두고 떠났다. 폐허를 헤치며 나아갔다. 속도는 느렸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쉬어야 했다. 남자는 길가에 버려진 소파에 앉았다. 쿠션이 습기에 불어 있었다. 허리를 굽히고 기침을 했다. 얼굴에서 피가 묻은 마스크를 벗고 일어서서 도랑으로 가 마스크를 빤 다음 짰다. 그런 뒤에 그냥 길에 서 있었다. 숨에서 하얀 깃털 같은 김이 나왔다. 이미 겨울이 닥쳤다. 남자는 몸을 돌려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옷가방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는 고아처럼 서 있었다.

310쪽, 상동


소년은 합판 밑에 아버지와 함께 앉아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눈을 감고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했고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 후에 다시 시도해보았다.

315쪽, 상동


이 작품의 진국은 부자지간 대화들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밑줄긋기 발췌는 일부러 피해 골랐다.



판형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마지막으로 붙인다.
328쪽이라는 볼륨감은 출판사의 속임수. 괜히 편집으로 페이지 늘리고 하드커버 붙여 가격 올리지 말고 북스피어의 책처럼 저렴하게 내줄 수는 없었을까…?
하드커버 좋아하는 한국독자 특성상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가 예로부터 들려오는데, 에잇, 그러면 나는 한국독자가 아니란 말인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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