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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더스트 (원제 : Hell or High Water)

"(come) hell or high water"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라는 뜻의 영어숙어라고 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어느 변호사가 주인공 형제에게 서류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방법을 조언해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옥에 있든 파도가 몰아치든 목요일까진 그대로 가요"




현대의 서부 텍사스, "채무 구제" "신속 대출" 등의 광고판들, 사람 드문 시골구석, 총을 자연스럽게 꺼내들거나 레인저에게 말 한 마디 지지 않는 동네사람들의 기질, 가족 농장의 바람개비가 내는 쇳소리, 레인저라는 개성을 가진 수사기관, 말을 타고 소떼를 모는 카우보이가 내뱉는 자조적인 농담(이 영화의 각본가 Taylor Sheridan이 카메오로 나온 장면), 황량하고 쓸쓸해 보이지만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풍광들이 매우 인상적. 절제의 미로 담담하게 그려낸 현대판 서부극. (범죄물보다 서부극 쪽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은행 강도를 저지르는 두 형제와 그들을 추격하는 베테랑 레인저의 이야기"라고 간결하게 말해버릴 수 있겠지만, 모든 캐릭터의 성격이나 배경 등이 매우 입체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영화감상 후 여운이 길고 오래 간다.
토비 하워드(크리스 파인 분)는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순진하고 여려 보이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고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머리와 자제심을 가지고 있다. (괜히 걱정했네 싶은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형 태너와도 아버지 관련으로 무언가가 더 있겠구나 하는 상상의 여지를 준다.
"위험한 직무를 운 좋게 완주하고" 3주 뒤에 퇴직할 예정인 레인저 마커스 해밀턴(제프 브리지스 분)은 수사의 방향을 딱 부러지게 잡는 능력자이지만, 밥 먹듯 인종차별농담을 해대고 곁에 사람가족이 없어 보이며 은퇴 후 일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염려되는 타입의 캐릭터.
두 사람 다 머리가 대단히 좋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 영화 후반에는 합당한 증오심까지 품게 되고 만다. 너무 머리가 좋아 상대방이 다 들여다보이는 바람에 형성되고 마는 무시무시한 공감대 같은 것이 두 사람을 미지의 미래로 던져 넣는다. 토비의 "얘기 마저 하려거든 언제든지 들러요"하는 평이해 보이는 인사말이 나라는 관객에게 얼마나 진한 여운을 남겼는지 모른다. 영화보고 온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앗, 마지막 두 사람의 대화!" 했을 정도이니까;

두 번을 보니까 태너의 "코만치"나 "평원의 제왕" 대사가 첫 감상 기억보다 빨리 나오길래 놀랐다. 카지노에서 처음 나온 단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은행에 잠식된 현대의 황량한 서부를 살아가는 태너의 인생철학이었던 모양이다. 코만치의 뜻을 영화 내에서 "(모두에게) 영원한 적"이라고 설명했던 것 같은데. 태너의 "사랑한다, 토비 진심이야" "토비, 엿이나 먹어"라는 말에는 생각보다 진한 응원의 뜻이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명대사란 명대사는 다 태너의 것이지 않았던가. 초반의 "죄 짓고 멀쩡한 놈 본 적 없어"도 너무 의미심장해서 놓칠 수가 없는 대사였다.

"번역 황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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