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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iadne의_실타래

[冊] 미사고의 숲

단련 2017. 8. 31. 06:00

알프레드 왓킨스라는 사내가 몇 번 아버지를 찾아와서, 이 나라의 지도를 보여 주며, 영적인 힘, 혹은 고대의 권력이 존재했던 장소들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고 한다 ― 세 종류의 문화가 만들어 낸 고분, 거석(巨石) 유적, 교회 따위가 말이다. 그는 이들 직선을 레이라고 불렀고, 이것들은 지하를 달리는 대지의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하며, 그 위에 서 있는 것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던 것이다.

(생략)

「(생략) 저 고대의 숲, 〈원초의 숲〉에서는, 집적된 오라는 그 이상의 것, 극히 강렬한 그 무엇인가를 형성해. 우리의 무의식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일종의 창조적인 장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아버지가 프리 미사고라고 부른 건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있어 ― 여기서 미사고란 미스(myth, 神話)와 이마고(imago, 心象)의 합성어이고, 이상화된 신화 속 등장 인물의 이미지를 의미해. 이런 이미지는 자연 환경 속에서 실체화되지. 피와 살, 의복, 그리고 ― 너도 봤다시피 ― 무기 따위를 가지고 말이야. 이상화된 신화의 형태인 영웅상은 문화적인 변천과 함께 변화하고, 그 시대 특유의 정체성과 기술을 취하게 돼. (생략)」

60~62쪽, 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김상훈 옮김, 열린책들, 1984, 2001


그들은 이제 다른 장소, 다른 시대에서 자가드가 요구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시대에 속해 있고, 그들의 방랑은 다른 민족의 전설이 될 것이다.

203쪽, 상동


주인공이 어렸을 적 살았던 떡갈나무 산장집 주변의 숲은 시공간이 뒤틀렸고 인간의 무의식을 미사고―신화적 영웅상으로 실체화시키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숲이었다. (서울시/구리시의 아차산으로 치환하면 백제와 고구려의 병사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의상대사가 민담적 과장된 이미지로 실체화돼서 자신들의 전설을 전승해가는 공간 같은 곳? 신비로운 역장이 쳐져있어서 섣불리 접근할 수 없고 시공간이 심하게 비틀려있어서 작은 산이라고 얕봤다가는 몇 개월, 몇 년을 헤매게 될 수도 있는 곳? 그곳의 온달은 진짜 온달이 아니지만 우리가 전설로 이해하는 온달이 맞기는 할 것이다. 신라군과 장렬히 싸우고 전사 뒤에도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장군. 그의 미사고와 담담히 대화를 나누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신화시대의 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현대인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제법 상을 맺는 느낌이라 재미있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주인공은 형의 편지를 받고 고향에 돌아온다.
주인공은 숲을 연구하다 피폐해진 아버지와 형에 비하면 적당한 호기심과 우려를 품은 평범한 남자였는데, 숲의 미사고인 귀네스와 사랑에 빠지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자신도 모르게 숲에 동화되어 신화가 되어간다.

톱날이 달려 있었지만, 잎사귀 모양의 창날과는 달랐다. 양쪽 날이 역(逆) 갈고리 모양의 톱니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일랜드의 켈트 인들은 〈가에볼가〉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무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명예로운 싸움에서는 결코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역 갈고리 모양의 창날은 그것에 찔린 상대방의 내장까지 그대로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아마 잉글랜드에서는, 혹은 귀네스가 태어난 켈트 세계의 일부에서는, 무기를 사용하는 상황에서는 명예 따위는 별로 중시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창자루에는 짧은 선들이 여러 각도로 새겨져 있었다. 물론 이것은 오검 문자(Ogham)였다.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어떻게 읽는지는 전혀 모른다. 나는 손가락으로 각인된 문자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귀네스?」
그녀는 말했다. 「귀네스 메크 펜 에브.」 자랑스러운 말투였다. 아마 펜 에브는 그녀의 아버지 이름일 것이다. 귀네스, 펜 에브의 딸?

138쪽, 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김상훈 옮김, 열린책들, 1984, 2001


미사고는 그 신화의 원류에 따라 해당지역의 고대어를 사용한다. 영어를 쓰는 주인공이 미사고들과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 퍽 재미있었다. 말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기도 하고 눈치코치로 넘어가기도 하고 이야기꾼의 "뚜렷한 심령능력"이나 네크로맨서의 능력에 기대기도 한다.

옛 이야기 같이 비현실적인 서사를 가진 신화와 그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주인공. 이런 성격의 주인공을 막상 숲 깊숙이까지 들어가게 만든 원동력은 여전사의 미사고라는 아이러니가 흥미로웠다. 싸움질 잘 못하는 평범한 남자가 신화적 인물이 되려면 지고지순한 사랑과 믿음, 원초적인 투쟁이 필요한 듯하다. 주인공은 세상 사람들이 노래하는 무의식에 녹아들어갔던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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